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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in Book

<나만의 책> 白石評傳 3

<나만의 책> 안도현, 『백석평전』 p456, 다산북스, 2014. 6

 

 

전쟁과 번역

317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남과 북에 머물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월북과 월남의 교차로에서 갈등을 빚고 행동에 옮겼다. 하지만 백석은 북한에서 오로지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는 3년 동안 백석은 10권이 넘는 소설과 시집을 번역했다.

318

백석의 자야는 ‘김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321

그렇다면 백석이 전쟁 이후 왜 번역 쪽으로 문학 호라동의 방향을 틀어 여기에 매진 했을까? 김재용은 백석이 북한 문학계의 주류적 흐름과 거리를 두면서 우회적인 길을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동화시의 발견

 

323

1956년 들어 백석은 1월에 나온 아동문학1호에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지게게네 네 형제를 발표했다. 이 동화시는 백석이 창작을 다시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아동문학의 영역으로 관심이 확대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1948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남한의 잡지 학풍에 실은 후로 무려 8년 만의 일이었다.

 

까치와 물까치

 

뭍에 사는 까치

배는 희고 등은 까만 새

물에 사는 물까치도

배는 희고 등은 까만 새

 

까치와 물까치는

그 어느 날

바닷가 산길에서

서로 만났네

 

까치와 물까치는

서로 만나

저마끔 저 잘났단

자랑하였네.

 

까치는 긴 꼬리 달싹거리며

깍깍 깍깍깍 하는 말이

“내 꼬리는 새까만 비단 댕기”

 

물까치는 긴 부리 들먹거리며

삐삐 삐리리 하는 말이

“내 부리는 붉은 산호 동곳”

 

깍깍 깍깍깍 까치 말이

“내 집은 높다란 들메나무

맨맨 꼭대기에 지었단다”

 

삐삐 삐리리 물까치 말이

“내 집은 바다 우 머나먼 섬

낭떠러지 끝에 지었단다”

 

깍깍 깍깍깍 까치 말이

“산에 산에 가지가지

새는 많아도 벌레를 잡는 데는

내가 으뜸”

 

삐삐 삐리리 물까치 말이

“바다에 가지가지

물새 많아도

물 속 고기 잡는 데는

내가 으뜸”

 

깍깍 깍깍깍 까치 말이

“나는 나는 재간도

큰 재간 있지─

우리 산골 뉘 집에

손님 올 걸

나는 먼저 알구

알려준다누”

 

삐삐 삐리리 물까치 말이

“나두나두 재간 있지

큰 재간 있지─

우리 개포 바다에

바람 불 걸

나는 먼저 알구

알려준다누”

 

깍깍 깍깍깍 까치 말이

“너는너는 아무래야

보지 못했지,

우리 산골 새로 된 협동조합에

농짝 같은 돼지를

보지 못했지”

 

삐삐 삐리리 물까치 말이

“너는너는 아무래야

보지 못했지,

물 건너 저 앞섬 합작사에

산같이 쌓인 조기

보지 못했지”

 

까치는 꼬리만 달싹달싹

한동안 잠잠 말이 없더니

갑자기 깍깍깍

큰소리쳤네─

“그래 나는, 우리나라

새로 선 큰 공장

높은 굴뚝마다에

뭉게뭉게 피여나는

검은 연기 보았지”

 

물까치는 부리만 들먹들먹

한동안 잠잠 말이 없더니

갑자기 삐리리

큰소리 쳤네─

“그래 나는, 우리나라

넓고 넓은 바다에

크나큰 통통선

높은 돛대마다에

펄펄펄 휘날리는

풍어기를 보았지”

 

그러자 까치는

자랑 그치고

기다란 꼬리를

달싹거리며

“물까치야, 물까치야

서로 자랑 그만하자,

너도 잘난 물새

나도 잘난 산새,

너도 우리나라 새

나도 우리나라 새

우리나라 새들

다 잘났구나!”

 

이 말 들은 물까치

자랑 그치고

기다란 부리를 들먹거리며

“서로 자랑 그만하자,

너도 잘난 산새

나도 잘난 물새

너도 우리나라 새

나도 우리나라 새,

우리나라 새들

다 잘났구나!”

 

바닷가 산길에서

서로 만나

저마끔 저 잘났단

자랑하던

까치와 물까치는

훨훨 날았네─

뭍으로 바다로

쌍을 지어 날았네─

크고도 아름답게 일떠서는

우리나라

모두모두 구경하려

훨훨 날았네,

모두모두 구경하려

쌍을 지어 날았네.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에 나오는 두 까치는 서로 자기 개성을 갖고 있다. 서로 구별되는 개성의 표현은 자기를 자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동화시는 아동들에게 애국적 감정을 환기시키는 예술적 형상을 갖고 있는 동시에 새에 대한 관찰력과 조국 각지의 생활에 보여주는 인식적 면에서도 역할을 놀고 있다. -리원우 아동문학 창작의 길에서

 

m.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로 시작하는 이맘때쯤 부르던 윤극영 선생의 동요가 생각난다. 백석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각, 이데올로기의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해방 후에도 비켜 서있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석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백석 또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북한에서의 백석은 러시아 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후 백석이 창작을 통해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은 ‘동화시’라는 새로운 장르였다. 시인으로서의 (사상적) 표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 아이(화제, 지제, 중축)의 아버지가 된 백석은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써 창작의 갈급함을 ‘동화시’라는 도구를 빌려 시인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남기 위하여

356,357

<문학신문> 1957919일자와 1958522일자에 각각 발표한 이 시들은 백석의 의도아 달리 생경한 구호와 일방적인 찬사를 반복적으로 나열할 뿐, 그 어떤 시적 감흥도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가 비판해 마지않았던 도식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백석의 문학적인 신념이 바뀐 게 아니라 문학을 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붉은 편지를 받들고 관평의 양을 키우다

361

백석이 파견된 곳은 북한에서도 최고의 오지로 꼽히는 삼수군이었다. 1959년 새해가 되자마자 백석은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가야 했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그 어떤 고난이나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라는 뜻의 관습적인 표현인데, 흔히 삼수갑산이라고 말하는 그곳이었다.

363

북한에서 김일성주의가 강화되고 주체문학이 당을 업고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백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무 것도 없었다.

 

평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377

이러한 과도한 목적의식의 노출은 햇빛은 빛이 없는 듯 오히려 더 강한 빛을 지닌 것이며 땅은 소리가 없는 듯 오히려 더 높은 소리를 지닌 것임을 보며 들을 줄 알아야 한다.”(나의 항의, 나의 제의는 백석 자신의 시론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시는 무난하고 평탄하고 애매하고 무기력한 것을 참지 못한다. 시는 긴장되어야 하며 박력에 차야 하며 굴곡이 있어야 하며 억양이 드러나야 한다. 시의 내면이 이러하여야 하며 시의 표현이 또한 이러해야 한다. 이러기 위하여서는 형식의 미가 필요하며 제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사라진 이름

410

1962년은 북한에서 시인으로서 백석의 역할아 끝나는 해였다.

413

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의 한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 아래 놓안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 밖에 없었다.

 

시인의 죽음

19961월 백석은 여든 다섯 살로 세상을 마감했다. 유족 리윤희(71)32(화제, 지제, 중축, 가제, )

419

해방 전 남한에서 그는 가장 주목받던 시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시인으로서의 말년응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백석에 대해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420

백석의 연인이엇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서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화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 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연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 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

422

고형진의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에 따르면 백석과 관련한 단행본, 학위논문, 평론, 에세이 등의 연구믈이 8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평전으로 복원된 백석의 생애와 문학/이동순

453

이 평론은 마치 소설을 읽듯, 전기를 읽듯, 혹은 작품 세계에 대한 분석적 연구를 읽듯 여러 방법과 스타일의 혼합적 기법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BOORO

: 시는 시인이 사는 시대를 투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식민지의 시인으로 살았던 백석, 김일성 주체 사상만으로 통일된 북한 땅에서 자유주의자이자 모더니스트 백석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냈을까요. 해방 전 남한에서 백석은 가장 주목받던 시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시인으로서의 말년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백석에 대해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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