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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in Book

<나만의 책> 白石評傳 2

<나마의 책> 안도현, 『백석평전』 p456, 다산북스, 2014. 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7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양응양 울을 것이다.

 

176

백석은 눈을 시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풍경의 배경으로 자주 활용했다. 그 결과, 눈으로 인해 삶의 고달픔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 눈 때문에 환하게 빛나는 효과를 충분히 얻어냈다.

 

최정희와 노천명과 모윤숙 그리고 사슴

183

노천명은 19381월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다. 교과서에도 후록된 적이 있는 그녀의 대표작 사슴이 여기에 실려 있다.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사슴은 여기에서 매우 점잖고 고결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이 시의 사슴이 백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백석이 두해 앞서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는 것을 노천명이 모를리 없었다는 점, 그리고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 아예 백석을 사슴이나 사슴군으로 호칭했다는 점 등을 마루어 볼 대 두 시편 사이의 친연성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키는 게 사실이다.

 

삐걱거리는 함흥 시절

 

 

처마 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明太는 꽁꽁 얼었다

명태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별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소리」

 

화가 정현웅

백석보다 2살 많은 정현웅

217

백석이 유난히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음식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각을 활용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다, 그는 민족적인 것의 원형, 혹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친 시인이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역사성의 현실적 현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나는 만주로 떠나련다

227

이것으로 본다면 협화회가 만주국 괴뢰정부 산하의 민간 친일단체라는 점 때문에 백석에게도 친일 혐의를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석은 만주시절에 일본어로 된 시를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았고, 시인으로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글을 쓰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말로 발간되는 만선일보에 시를 한편도 발표하지 않았고, 국내의 신문과 잡지에만 시를 기고했다. 1940년을 전후해서 거의 모든 시인과 작가들이 일본에 무릎을 꿇고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백석의 행위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북방에서

 

북방北方에서

정현웅에게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夫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234

새 녯날이라는 이 모순적인 표현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의미가지 확장하면서 현재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동력 또한 옛 것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m. ‘오래된 미래’의 다른 해석이 여기 있다.

  

권태와 환멸

244

백석은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으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보고자 하였다. 숭고한 이상주의자로서 만주의 시적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던 그는 1940년 가을부터 만주에서의 권태와 환멸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m. 백석 시의 특징 중 하나는 반복... 후대에 영향을 미친 수법,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253

문장의 끝마다 방점을 찍는 것은 시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판단을 강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귀농歸農

 

257-259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사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압록강이 가까운 안둥 세관에서

278

김응교가 공개한 문인창씨록文人創氏錄에는 백석이 사라무라 기코白村夔行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백석이 이렇게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백석은 백석이고자 했다.

 

시의 잠적

284

앞서 19382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어 1943년까지 16,000명이 넘는 조선의 펑년들이 일본군에 입대했다. ... 이렇게 해서 1944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전쟁터로 내몰린 조선 청년의 숫자는 21만명이 넘었다.

286

천황제 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 백석은 시인으로 사는 게 치욕스러웠다. 차기 어려운 모욕이 그를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붓을 꺾었다, 그게 자그마치 5년이었다.

288

일제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한 그 당시의 백석에게 침묵은 하나의 무기였다.

 

해방된 평양에서

293

그들(허준, 백석)에게는 해방 직전의 반인륜적이고 비문학적인 일제의 폭압을 아슬아슬하게 견디며 시대의 괴로움 속을 통과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309

백석의 시가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것은 194810학풍창간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었다.

 

310-311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내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바위 옆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3에서 계속≫


BOOKRO

: 이 책의 저자 안도현은 ‘백석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세상은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곳이었다. 그는 이 더러운 세상을 혼자서라도 맑은 사람이 되어 건너가고 싶었던 것이다.’(70쪽)라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건널 수 없는 세상에서 살다 갔습니다. 아니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